현대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자연 과학의 발전에 힘입은 것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넘어 인간적이고 따뜻한 도덕적인 의사에 대한 기대는 점점 커지고 있다. 환자들은 여전히 실력 있는 의사 못지 않게 환자를 진심으로 가족같이 대해 줄 의사를 기대한다. 의사가 아니라도 병을 고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의사에게만 진단과 치료의 독점적 전문성과 자격을 부여한 것은 우리가 몸담은 사회가 부여한 엄청난 특권이다. 그러나 특권은 또 그만큼의 의무를 요구한다.
전문직에게는그 위상에 걸맞는 도덕성의 수준이 있으며, 사회의 도덕적 요구에 부응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의사들로 하여금 이러한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의사들 개인의 타고난 도덕성이나 노력에만 맡겨서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수술을 잘 하고도 보호자의 무리한 퇴원 요구에 관행적으로 반응하였다가‘살인 방조죄’라는 실형을 선고받은 보라매 병원 사례나 공공연하게 언론에 거론되는 제약 산업과의 밀착 관계, 전공의에 대한 폭행, 폭언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의료윤리 교육이 더 이상 고상한 인격도야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일임을 웅변하고 있다. 전문직으로서의 품위 유지뿐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의료윤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체계적인 학습과 수련을 통하여 가르쳐져야 한다. 의사 개인의 가치관이 어떠하던지 의사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공통의 윤리적 감각과 지식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료윤리는 이상주의자들의‘도덕적 의사’에 대한 추구이전에 전문직으로서 생존을 위해 반드시 습득해야하는‘필수 지식’(Vital Knowledge, Survival Ethics)이다”
1980년대 초에 일부 의과대학에서 시작한 한국의 의료윤리 교육은 이제 전국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의과대학에서 가르치는 의료윤리의 내용은 주로 생명윤리적(Bioethics aspect) 관점인 인간복제, 안락사, 낙태, 유전자 조작 등 지식적 내용에 치우쳐 있고, 이해상충, 금전문제, 의사환자관계 등 전문직 윤리의 영역에 대한 강조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러한 전문직 윤리의 영역은 의과대학뿐 아니라 졸업 후 교육의 중요한 부분인 전공의 교육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현실적으로 합당해 보인다.
사회가 기대하는 윤리적 의사란 생명윤리적 관점뿐 아니라 전문직윤리에도 충실한 의사이다. 이러한 점에서 전공의 윤리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한국사회에서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호주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도 각 학회를 중심으로 의료윤리교육에 관한 구체적 교육목표들을 일찍부터 제시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커리큘럼들을 도입해 왔다. 전공의 시절의 윤리교육은 그야말로 도덕적 의사를 위한‘마지막 관문’(rate-limiting step)이다. 체계적인 수련제도 하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전문성을 함양할 기회를 놓친다면 이후에는 몇 곱절의 노력을 기울여도 같은 효과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공의 시절은 도덕적 의사를 위한 현실적 교육의 마지막 관문(rate-limiting step)이다” 전공의를 위한 의료윤리교육 목표의 개발은 시작부터 몇 가지 딜레마를 전제로 시작하였다. 보다 완벽한 구조하에서 의료윤리의 이론과 실제를 망라하는 교육목표의 제정이라는 이상과 의료윤리 교육자의 절대적인 부족,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 등 열악한 현실 사이에 선택이 필요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물음에대하여 국내 의과대학에서의 의료윤리 교육이 양적으로나 질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궤도에 진입하였고 학생들에 대한 교육이 주로 이론적인 면에 치우친다는 전제하에 전공의 윤리교육은 보다 현실적인 주제들에 집중하자는 데 견해를 같이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기획 단계에서 개별 전문 과목에만 한정되는 특별한 주제들이나 일반적인 임상 의사들이 접하기 어려운 주제들은 제외시켰다. 낙태, 배아 복제, 유전자 관련 윤리 등 대부분의 의료윤리 교과서에서 흔히 다루는 주요 주제들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특별한 주제들에 대해서는 향후 개별 전문 학회를 중심으로 하여 더 발전된 체계의 교육목표가 만들어질것을 기대한다.
본 서의 2부는 교육목표 및 사례의 해설서이다. 개별 사례에 대한 저자들의 견해를 간략히 언급하였으며 언론 기사, 관련 법령 및 강령, 에세이 등 추가적인 참고자료들을 제공하였다.
끝으로 저자들이 가장 염려한 부분은 금번 개발된 교육목표의 활용에 관한 부분이었다. 교육목표의 단순한 나열만으로는 자칫 서가에 꽂힌 채 사용되지 않는 죽은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각 학습목표마다 사례를 달아 활용도를 높이고자 하였다. 저자들이 제안하는 본 서의 활용방안은 다음과 같다.
1) 전공의를 위한 의료윤리 교육목표는 각 학회 혹은 수련병원의 전공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각 소주제와 사례들은 의료윤리 집담회(Medical ethics grand rounds)나 소그룹 토의(Small group discussion)의 형식으로 다루어질 것을 권한다. 수련기관의 규모와 형편에 따라 병원 전체 전공의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집담회 형식이, 개별 의국별로 진행할 때는 소그룹 토의의 방식이 효과적일 것이다.
2) 3-4년의 수련기간을 고려할 때 격월 혹은 분기에 한 번 정도 진행한다면 20개의 소주제를 대부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보다 빈도가 적은 경우에는 순서에 무관하게 필요한 소주제만을 선별하여 활용할 수 있겠다.
3) 각 학회와 병원 교육수련부, 더 나아가서 임상 각과마다 의료윤리 교육을 위한 전문 인력 양성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이를 위해 학회나 병원의 추천을 받은 담당자를 위한 별도의 연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본 교육목표를 개발한 주체인 대한의학회와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를 중심으로 하여 체계적인 연수 프로그램의 마련이 절실하다. 한편 짧은 시간 안에 각 수련기관 혹은 학회마다 이러한 일을 감당할 전문가를 양성해야 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를 중심으로 전문가 풀(pool)을 갖추고 이들이 지역별로 순회하여 집담회 등을 인도하도록 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도움은 각 학회와 수련기관마다 전문 인력이 양성될 때까지 한시적으로만 기능하도록 해야 한다.
4) 전공의 의료윤리 교육을 담당할 교육자들이 본 교육목표에 포함된 윤리적 개념과 사례들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별도의 교육자용 지침(teacher’s manual)을 본 서의 2 부에서 다루고 있다. 윤리적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항상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꼭 알아야 할 법적, 윤리적 필수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5) 이러한 교육의 활성화 및 정착을 위해서 병원 평가, 혹은 전문의 고시의 자격 요건의 하나로 의료윤리교육을 인수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요구된다. 전공의 시절에 일정 수준 이상의 의료윤리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지 못한다면 상당한 정도의 불이익이 개인과 기관에 돌아가도록 제도화 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임상 각과의 전문의 고시에 공통 과목으로 윤리에 관한 내용이 출제된다면 본 전공의 윤리교육목표의 활용도를 가장 효율적으로 높이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본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손수 원고를 집필하심은 물론, 기획과 출판, 홍보 등 전 과정에 헌신해 주신 서울의대 장기현, 연세의대 손명세, 그리고 현 회장이신 울산의대 고윤석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모쪼록 본 서가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이자 희망인 젊은 의사들이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 속에서 양질의 의술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한알의 밀알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2010년 10월
저자를 대표하여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정유석
구분 | 13시 이전 | 13시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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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 제목 | 글쓴이 | 등록일 | 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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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구매할 수는 없나요? | pwe | 2020.04.08 | 답변완료 |